기억이 무너질 때 드러나는 인간의 얼굴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기억과 윤리의 경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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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기억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은 어디까지 자기 자신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품이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전직 연쇄살인범 ‘병수’의 1인칭 시점은 독자를 안정된 도덕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진실과 망상, 죄와 정의, 보호와 폭력의 경계를 끝없이 흔든다. 이 소설이 강렬한 이유는 단지 반전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를 지탱한다고 믿는 가장 단단한 기둥, ‘기억’이 흔들릴 때 윤리와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남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데 있다. 1. 기억이 흐려질수록 선명해지는 공포: ‘병수’라는 서술자의 위험성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다 보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장벽은 주인공 병수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알츠하이머로 인해 일상적인 기억조차 붙잡기 어렵고, 방금 전의 장면과 오래전의 기억이 뒤섞이며, 확신은 늘 의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살인자였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병수의 시점은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다. 죄책감의 흔적이 없는 듯 보이는 순간도 있고, 의외로 “나름의 질서”와 “나름의 규칙”을 갖고 행동했다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이 지점에서 독자는 불편해진다. 우리는 살인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병수의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가 그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 잠시 동조하게 된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살인’ 자체가 아니라, 기억의 붕괴가 만들어내는 현실의 불확실성이다. 병수는 어떤 사실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하지만, 그 사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독자 역시 병수의 기록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그 기록이 언제든 왜곡될 수 있다는 긴장은 작품 전체를 팽팽하게 만든다. 이때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지만 잔혹하다. “내가 지금 믿고 있는 확신은, 정말 확신인가?” 우리는 일상에서도 기억을 기반으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그런데 기억이 흔들리면 판단도 흔들린다. 병수는 그 흔들림...

평범한 하루, 스러지는 꿈 : 체호프 단편 속 인간상

체호프는 러시아 일상의 평범한 단면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그의 단편들에는 소박한 희망과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사소한 갈등이나 불가항력적인 운명 앞에서 스러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체호프는 대단한 사건 없이도 인간 내면의 공허와 허탈을 탁월하게 그려내며, 우리 모두가 겪을 수 있는 보편적 상실감을 조명한다.

체호프의 단편


1. 체호프 단편에 흐르는 일상의 무력감

체호프의 단편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일상의 기록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평범함 이면에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무력감이 잔잔하게 스며 있다. 체호프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에게 극적인 사건이나 대단한 비극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소한 일상의 균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가령, 「관리의 죽음」에서는 주인공이 사소한 실수로 인해 끝없는 불안과 수치심에 시달리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사회적 대사건도 아니고 정치적 격변도 아니다. 단지 평범한 직장 생활 중 일어난 작은 실수일 뿐이다. 그러나 체호프는 이를 통해 개인이 사회 구조 속에서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체호프는 일상적 사건에 대한 비범한 통찰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좌절과 허무를 보여준다. 인물들은 거창한 꿈이나 대의 없이 살아간다. 그들은 대개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러한 일상은 독자로 하여금 '나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다'는 공감과 동시에 서글픔을 느끼게 한다. 체호프는 의도적으로 감정을 고조시키지 않는다. 차분한 서술 속에서 오히려 더욱 짙은 비애가 느껴진다. 이처럼 체호프의 단편들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무력감을 가장 일상적인 순간에 포착해낸다. 이는 거창한 서사보다 오히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2. 소시민적 삶과 잃어버린 꿈

체호프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소시민 계층에 속한다. 이들은 대단한 야망을 품거나 혁명적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삶을 지키기 위해 애쓰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꿈을 잃어버리고 만다. 「굴」이나 「우수」와 같은 작품에서는 평범한 이들이 살아가는 일상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반복으로 채워진다. 그들은 가끔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의문을 품지만, 현실을 바꾸기엔 너무나 무력하고, 결국 체념하고 만다.

체호프는 이러한 소시민들의 모습을 비판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꿈을 향해 발버둥칠 힘도, 완전히 포기해버릴 용기도 없는 인간 군상들은 체호프의 서술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얻는다. 그들은 비록 작은 세계 안에 갇혀 있지만, 그 안에서도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때로는 작은 희망을 품는다. 체호프는 이 보잘것없는 희망조차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깊이 있게 드러낸다.

특히 주목할 것은 체호프가 인간의 무력감을 연민의 감정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는 체호프 특유의 '웃픈' 정서를 만들어내며, 독자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소시민적 삶은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하면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이중성 속에서 체호프는 인간 존재를 냉정하면서도 따뜻하게 바라본다.

3. 작은 사건 속에 스며든 인간 내면의 슬픔

체호프는 대사건이 아닌 작은 사건들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슬픔을 포착해낸다. 「사랑스러운 여인」에서는 여주인공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존해 살아가지만, 결국 아무 의미 없는 반복 속에 허망하게 늙어간다. 그녀의 삶에는 겉보기에 특별한 비극이 없다. 그러나 체호프는 사랑, 결혼, 상실을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 그녀 내면에 깃든 공허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독자는 그녀의 삶을 따라가며,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은 비어 있는 인간 존재의 슬픔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체호프는 독자에게 강요하거나 교훈을 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삶의 단편들을 조용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단편들 속에서 독자는 저마다의 슬픔을 발견하게 된다. 「담배를 끊는 일」이나 「농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선택, 작은 실수, 별것 아닌 말 한마디가 인물들의 삶에 스며들어, 누적된 공허와 절망으로 이어진다. 체호프는 인간 내면의 슬픔이 격렬한 외침이나 눈물보다 오히려 조용한 일상 속에서 더욱 깊게 배어든다는 사실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체호프의 접근은 인간 존재의 보편적 비애를 드러낸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꿈을 잃고, 희망을 잃고, 결국 자신을 잃는다. 체호프는 이 과정을 결코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보여주며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긴다. 그 덕분에 그의 단편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독자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결론

체호프의 단편은 평범한 하루 속에 스러지는 인간의 꿈을 조용히 보여준다. 그는 인위적인 드라마나 과장된 감정을 배제하고, 오직 일상의 순간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무력함과 허무를 포착해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대단한 영웅도, 악인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평범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작은 슬픔과 좌절은 우리 모두의 삶을 반영한다. 체호프는 웃음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얽힌 복합적인 인간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인간 존재의 깊이를 탐구했다. 그의 단편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무력감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주침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더욱 깊이 있는 삶의 통찰을 얻게 된다. 체호프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삶이란 원래 그렇게 덧없고, 그렇기에 더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