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어린 소년들이 무인도에서 문명을 잃고 본능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 내면에 잠재된 폭력성과 문명 질서의 불안정성을 조명한다. 이 작품은 문명이라는 얇은 외피 아래 숨겨진 인간 본성의 야만성과 그 충돌의 비극적 결과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다.
1. 『파리대왕』의 배경과 상징 구조
『파리대왕』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폭력성과 혼란을 목격한 작가 윌리엄 골딩이 인간 본성에 대해 던진 철학적 질문이다. 무대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무인도로 설정되며, 여기에 비행기 추락으로 모인 어린 소년들이 중심 인물이다. 이들은 어른 없이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며 처음에는 민주적 절차를 따라 규율을 세우고 문명을 재현하려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질서와 규칙은 점차 흐려지고, 두려움과 불신, 권력에 대한 욕망이 팽배해지며 소년들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작품 속 여러 상징은 이러한 변화를 뚜렷이 드러낸다. 조개껍질(conch)은 민주주의와 질서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그것이 깨지는 순간 문명이 종말을 고한다. 반면, ‘파리대왕’은 소설 제목이자 상징으로서 인간 내면의 사악한 본능을 의인화한 존재로 묘사된다. 특히 ‘짐승’이라는 존재는 실체 없는 두려움이지만, 결국 그것이 인물들의 의식 속에서 실존처럼 자리잡으며 폭력성과 야만성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생존을 다룬 모험 서사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축소판을 통해 문명이라는 구조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억눌린 본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시사한다. 무인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문명이 제거된 상태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변모하는지를 실험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골딩은 이를 통해 인간 본성이 본질적으로 선하지 않으며, 문명은 그것을 억누르는 얇은 베일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2. 문명 질서의 붕괴와 본능의 표출
『파리대왕』은 문명적 가치와 규범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랄프는 민주적 리더십을 지향하며 불을 피우고 구조를 기다리는 이성적인 질서를 대표한다. 반면, 잭은 사냥과 쾌락, 권력에 대한 욕망을 앞세우며 집단의 방향을 본능에 따라 전환시킨다. 이 두 인물의 갈등은 결국 문명 대 본능의 대립으로 확장된다.
처음에는 모두가 랄프의 지도 아래 협력하려 하지만, 두려움과 식량 문제, 지루함 등의 현실적 어려움이 반복되며 점차 잭의 방식이 지지를 얻는다. 그가 주도하는 사냥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니라, 내면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해방시키는 의식으로 작용한다. 특히 사냥 후 벌어지는 축제는 본능적 해방과 동물적 본성을 자극하는 장면으로, 소년들이 문명의 가면을 벗고 본질로 돌아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사이먼과 피기의 죽음이다. 사이먼은 진실을 깨닫고 ‘짐승’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군중 심리에 휩쓸려 희생된다. 피기는 이성의 목소리를 대변하지만 무참히 살해당하며, 이로써 이성과 문명은 완전히 붕괴된다. 이 과정은 문명적 규범이 집단적 본능과 충돌할 때 얼마나 쉽게 희생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의 핵심이다.
작품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인간 사회에서 ‘규범’이란 얼마나 인위적이며, 실제로는 상황과 감정, 집단 분위기에 따라 언제든 무력화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어린아이들이라는 설정은 순수성과 본능의 이중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악하거나 최소한 불완전하다는 골딩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파리대왕』은 문명이 무너질 때 드러나는 인간의 진짜 얼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3. 윌리엄 골딩이 말하는 인간 본성의 실체
윌리엄 골딩은 『파리대왕』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인간은 본래 선하지 않으며, 억눌린 폭력성과 자기중심성, 권력 욕망이 기회를 얻으면 언제든 표출된다고 본다. 이는 작중 등장인물들의 변화 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문명의 규범이 사라지자 아이들은 순식간에 잔인한 존재로 변모한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규칙과 우상을 만들어낸다.
골딩은 특히 ‘짐승’이라는 개념을 통해 두려움이 어떻게 폭력을 유발하고, 문명적 판단을 마비시키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짐승은 처음에는 외부의 적으로 인식되지만, 사이먼의 깨달음처럼 실제 그것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사악한 본능이다. 그러나 군중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이먼을 짐승이라 여기며 폭력으로 제거한다. 이는 진실보다는 감정과 공포에 휘둘리는 인간 심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파리대왕』의 결말은 이성의 패배이자, 인간 사회가 문명의 이름 아래 얼마나 위험한 본능을 숨기고 있는지를 경고한다. 마지막에 등장한 어른들은 구조자이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보여준 폭력성의 연장선에 있는 존재다. 골딩은 이를 통해 전쟁과 같은 현실의 폭력이 단지 야만이 아닌, 인간 본성에서 기인한 것임을 은연중에 비판한다.
이 작품이 현대 독자에게 여전히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 때문이다. 인간은 선하지 않으며, 문명이라는 얇은 장막 아래 감춰진 야만은 언제든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진실이 독자의 내면을 깊이 흔들어놓는다. 결국 『파리대왕』은 인간이 만든 규범과 제도, 윤리의 한계를 직시하게 만들며,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결론
『파리대왕』은 단순한 소년들의 생존기라기보다 인간 본성과 문명의 관계를 철저히 파헤친 문학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골딩은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이 문명의 껍질을 벗었을 때 얼마나 쉽게 본능에 지배되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작중 인물들이 무인도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문명적 질서가 얼마나 쉽게 붕괴되고, 인간이 폭력과 두려움에 얼마나 쉽게 휘둘리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은 독자에게 깊은 충격을 안긴다. 무엇보다 작가가 강조한 점은 인간 내부의 사악한 본능이 항상 존재하며, 이는 제도나 교육만으로는 완전히 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파리대왕』은 우리 사회의 규범과 윤리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경고하며, 인간의 본성을 직시해야만 진정한 성숙과 책임 있는 문명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골딩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고전으로 남아 있다.
